본문 바로가기

방자망의 신앙관

<진정한 찬양>

 

 



요즘 여기저기서 트로트 찬양을 부르는 구자억 목사님의 영상을 접하게 된다.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찬양의 정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찬양이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찬양의 정의에 '사람들'이나 '나'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It's NOT about 'me' or 'us'.

It's about Him and His glory.

꼭 음악이 아니어도 된다.

지금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래로 부르는 찬양'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유일한 청중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찬양을 받을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찬양은 나의 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부르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부르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음악에 기독교적 가사를 넣으면 찬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진심이 멜로디와 가사, 그리고 곡을 연주하는 사람과 노래를 목소리로 부르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에서 드러나야 한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찬양을 제대로 부를 수 있을까?

우선 찬양을 받으시는 대상이 하나님이신 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만을 알고 그분의 거룩과 공의는 잘 모른다.

그 결과... 하나님은 뭔가 포근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로 전락해버렸다.

이제 교회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하나님은 어느새 만만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기 시작하면 그런 환상은 즉시 깨질 것이다.

구약성경의 여호와 하나님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성육신 예수님조차도 그렇게 만만하게 묘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구약의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직면할 때, 신약의 제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볼 때...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모두 동일하다.

그들은 영광의 주님 앞에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졌다.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함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고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어두움으로 가득 찬 그들은 빛이신 그분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한번 물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져서 진정한 경외의 마음으로 기도를 올려드린 적이 언제였습니까?"

사람이 많은 수련회 예배당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홀로.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찬양을 나 편한대로, 내 마음대로 부를 수 있을까?

구자억 목사님이라는 분이 트로트로 찬양을 부른다길래 영상을 한 번 봤다.

첫째, 찬양이 아니다.

대중들을 의식하고 부르는 모습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즐기는 모습이 역력하다.

CCM 가수들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

CCM 가수는 일차적으로 최선을 다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다음에는 그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나 곡의 멜로디가 좋아서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찬양의 본래 목적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과 인기를 즐기게 된다면, 그냥 그만두는 것이 본인의 영혼의 안녕을 위해 유익할 것이다.

둘째, 음악이 방정맞고 경박하다.

트로트를 비하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장르를 떠나서 찬양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한 자세로 드려져야 한다.

여기서 '진지한 자세'라는 말은 꼭 절제된, 엄숙한 분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축제적인 분위기로 찬양하는 것도 마음의 중심이 바로 서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윗 왕도 하나님 앞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춰서 찬양으로 올려드렸다. (미갈은 업신여겼지만...)

그러나 영상을 직접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부러 익살스러운 표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고 중간중간에 애교 섞인 표정들을 지으면서 대중들을 웃게 만들려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

하나님 앞에서 신나게 찬양하고 춤을 추는 것과 일부러 우스꽝스러운 느낌으로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셋째, 가사와 음악이 어울리지 않는다.

찬양에 대해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이 부분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찬양의 멜로디와 가사가 어울려서 찬양을 올려드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찬양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는 성경에서 다니엘 3장 18절에서 나오는 부분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 앞에서 절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협박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3:17)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3:18)

순교를 각오한 세 청년이 바벨론의 왕 앞에서 담대하게 대답을 하는 이 장면에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만 취해서 가벼운 멜로디의 찬양으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트로트 찬양'도 마찬가지다.

가사 안에 복음의 일부를 최대한 단순화시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을 장난스럽게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복음은 장난이 아니다.

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약 여러분의 부모님, 남편, 아내, 형제, 자매 또는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면서 죽었는데...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가 장난스럽고 익살스럽게 노래를 부르면 좋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글을 마치려고 한다.

이런 노래로 대중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Are you serious?

영상을 꼭 한번 보길 바란다.

대중들이 깔깔거리며 웃으면서 흥에 겨워 춤을 출 때,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며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 복음이 교회 안에서마저 더럽혀지고 짓밟히고 있는 이 악한 시대에...

성경이 증거하는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그분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찬양을 전심으로 올려드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