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예수
내가 아는 예수
좋은나무교회 87또래 박준성
2013.09.11.
이 글은 27살의 나이에 제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자 고백입니다. 사실 담임목사님께서 전에 여러 번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안다면 최소한 A4 한 페이지 정도는 성경이나 다른 참고자료 없이 예수님에 대해 쓸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서 성경, 신앙서적, 인터넷 등의 다른 어떤 것을 참고하지 않고 성령님께서 지혜를 허락하시는 대로 이렇게 글로 적어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글 하나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아는지를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 없고, 결국 각자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지는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실제로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번쯤 ‘내가 아는 예수’에 대해 다시 생각을 정리해보는 것도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믿으며 이 글을 시작해봅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구약성경의 내용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땅 위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은 구별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그저 하나의 장난감으로 취급하거나 멀리서 방관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통제하는 방법으로는 진정한 사랑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유한한 피조물인 사람에게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도록 허락하심으로 그분과 더욱 풍성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거짓에 속아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였고 그 순간부터 죄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셨지만 양적으로 확장하며 질적으로 심각해지는 죄를 연약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프로젝트’를 계획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훈련시키시고 그에게서 한 민족이 생겨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그 민족을 일으켜 온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 되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질투를 사게 되어 애굽(Egypt)으로 노예의 신분으로 팔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버리지 않으시고 어려운 상황들에서 구원하셔서 결국 애굽의 총리로 세워 흉년을 대비하도록 하여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에게 생존의 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거주하게 되는데 총리 요셉이 죽고 난 후에 세워진 애굽의 왕은 요셉의 공헌에 대해 무지하여 남겨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으로 삼고 억압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지자로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도록 도우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불평과 불순종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도록 하셨는데 이 징벌은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성장하도록 훈련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40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지만 그 안에서도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악들이 넘쳐났고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사(judge)들을 보내어 죄에 물든 백성들을 벌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회개시키셨지만 죄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이방 국가들처럼 왕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겠다는 또 하나의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요구에 응하셨고 사울을 왕으로 허락하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실패한 왕이었고, 하나님은 오히려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좌에 오르도록 하셨습니다. 다윗도 죄를 많이 지은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했던 왕입니다. 그는 자신이 거하는 곳은 왕궁인데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 없는 것이 마음이 아파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짓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손에는 전쟁으로 인한 피가 많았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에 의해 성전이 건축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1차적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취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물리적인 건물로써의 성전을 뜻하셨던 것이 아니라 훗날에 다윗의 후손으로 탄생할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수많은 선지자들의 경고와 하나님의 진노, 이스라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기 등 언급하고 싶은 부분들이 많지만, 제가 꼭 말하고 싶었던 몇 가지 중요한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 죄의 시작, 이스라엘의 반복적인 죄악,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내가 아는 예수’에 대해 쓰는데 구약에 대한 내용만으로 벌써 한 페이지를 넘겨서 너무 많아 보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수님에 대해 쓰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잠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virgin) 마리아에게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셨고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가르치고 많은 기적들을 보이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세우셔서 훈련시키시고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를 명확하게 말씀하셨으며 가룟 유다, 유대인 지도자들, 본디오 빌라도, 로마 군병들로 인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죽은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셨고(영문 사도신경에 나옴) 3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수많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고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시며 마지막 날에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가장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는 말씀 중 하나는 빌립보서 2장 6-11절인데 다행히 외우고 있어서 잠시 나눠봅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사도바울의 이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단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이나 다른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보다 열등한 분이 결코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Trinity)로 세 분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며 그 신비는 사람의 지혜로는 절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마치 하나님보다 낮은 분인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들이 언급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적 특권을 스스로 내려놓으시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사람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기를 기뻐하셨고 아버지께서는 그런 아들에게 가장 높은 이름을 주셨고 가장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실패한 ‘이스라엘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프로젝트’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한 민족으로부터 온 열방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되심을 선포하여 죄로 인해 타락한 세계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의 부족함이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이미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또한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프로젝트’를 실패하셔서 그 문제를 허겁지겁 수습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죄에 빠질 것을 아시면서도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허용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유는 인류의 죄의 심각성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우리가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처음에 구약의 내용들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방금 ‘죄의 문제 해결’과 연결시켰는데 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완전하신 분의 여러 성품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끝없는 사랑(unfailing love)과 공의(fairness and justice)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성품 중 어느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삼위일체 안에서 온전한 사랑으로 거하셨고 모든 일에 있어서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증오하십니다. ‘죄에 대해 너무 집착하시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죄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웬만한 죄는 가볍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누리기 위해 우리를 만드셨는데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기를 거절하고 죄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벌은 사형(死刑)입니다. ‘하나님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라고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그분과 무관하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계란을 먹기 위해 프라이팬에 올려놨는데 계란이 다 타버려서 냄새가 나고 못 먹게 되어버렸다면 당연히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계란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더러워졌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의 역겨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죄의 문제를 그냥 넘겨버릴 수 없으니 우리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죽여 마땅한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할 희생양이 필요한데 이미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 죄를 사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누군가가 대표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라는 사형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그 일을 맡기시고 아들은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십자가 위에서 그 일을 감당합니다. 구약의 모세오경에 보면 제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나오는데 그런 일시적인 의식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온전한 제물로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신 ‘이 잔을 거두어주시옵소서’라든지 십자가 위에서 부르신 시편 22편 1절의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예수님이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서 연약한 소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언제나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하셨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도 틈만 나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며 관계를 누리셨는데, 십자가 위에서는 최초로 그 관계가 깨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괴로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괴롭게 만들었던 ‘그 잔’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요?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이나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이 아닙니다. 그 잔 안에는 우리 죄인들이 마땅히 마셨어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들어있었는데 그것을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들이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신비인 ‘십자가 사랑’입니다.
3일 후의 부활은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신 승리의 선포이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 죄의 대가로 받아들이셨다는 확증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언급할 때 부활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부활이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그리고 승천 후에 그분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당당히 앉아계시고 두 번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세상을 등지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도록 도우시며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로우셨기 때문에 우주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에 우리 같은 죄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만들지 않으셨어도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가 회개하여 그분께 돌아오도록 오래오래 기다리고 참으셨기 때문에 만약 그리스도 곧 메시아를 약속하지 않으시고 온 인류가 구원받지 못하게 됐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는 조금도 흠집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한낱 흙덩어리에 불과한 우리에게 태초부터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은혜이고 신비입니다.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그 사랑.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담겨져 있는 복음서들과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넘치는 서신들이 담겨져 있는 신약성경이 더 친숙하긴 하지만 때로는 구약에 담겨져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들이 제 마음을 강하게 울릴 때가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창조의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셔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손을 멈추시고 숫양 한 마리를 대신 바치라고 하실 때 그 숫양은 훗날에 오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욥이 탄식하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중보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외칠 때 그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 싶다고 기도드릴 때 그 성전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에도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말씀들이 가득하고 이사야서 53장에 언급되는 ‘고난 받는 종’을 읽으면 그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다가와서 ‘당신에게 예수란 어떤 존재입니까? 왜 그분을 위해 산다고 합니까?’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쉽지 않지만,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행위를 해도, 무엇을 내어주어도,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할지라도 제 몸과 영혼을 파괴한 죄를 씻어내지 못할 때 그분이 제 죄를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의 핏값으로 저를 사셨고 자격 없는 저를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제 삶의 주인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을 제대로 알기 전에는 저는 죄의 소유였고, 이제는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영생을 제게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어찌 그분을 위해 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참 어린 양, 세상의 빛, 나의 창조주, 나의 구원자, 나의 주인, 나의 생명의 근원, 나의 유일한 소망, 나의 영원한 상급, 나의 사랑, 나의 모든 것, 다시 오실 왕,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분 밖에서 저를 정의할 수도 없고 그분 없이는 제가 존재할 가치도 없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듯이 저 또한 제 십자가를 지고 그 고난에 참여하여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죽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